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8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[파일:8대박정희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취임 연설을 하는 [[박정희|{{{#ffffff 박정희}}}]] 대통령'''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72박정희당선_조선일보.png|width=100%]]}}} || || '''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'''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youtube(Z7t5n0JHCd8)]}}} || || '''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취임식 영상''' || [[10월 유신]] 이후의 [[대한민국 대통령 선거]]는 '''단일 후보'''만 출마해서 '''만장일치'''로 통과시키는 말 그대로 '''관제 간접선거'''였기 때문에 [[선거]]의 의미는 사실상 없었다. 유신 이전 대통령 선거는 원래 국민 직선이었지만 [[1972년]] [[11월]] 이른바 '''[[10월 유신]]'''으로 불리는 제7차 [[헌법]] 개정이 [[1972년 국민투표|국민투표를 통과]]하면서 간선제가 도입되었다. 우선 국회 외에 '''[[통일주체국민회의]]'''라는 별도의 헌법기관이 신설되었으며, 이 기구에서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.[* 또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는 권한도 있었다. 정확히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맘대로 임명하되,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[[거수기|찬반 투표]]를 거치는 식.]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각 행정구역에서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었으며, 농촌에서는 [[소선거구제]], 도시에서는 [[중선거구제]]를 적용하였다.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 기구라기보다는 [[예비군 지휘관]], [[새마을운동|새마을]] 부녀회장, [[한국자유총연맹|한국반공연맹]] 지부장, 지역 [[농협]] 조합장, [[한국노동조합총연맹]][* 당시에는 관변, 어용 노동조합이었다.] 계열 노동조합 위원장 등 '''관변성향 인사들'''이 감투 한 번 써보려고 모인 자리였다. 자세한 것은 [[통일주체국민회의]] 항목 참조. 대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, [[장충체육관]]에 모여서 진행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번째 전체 회의에서 단일 후보에 대해 투표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한다. [[1972년]] [[12월 15일]] 대의원 선거에서 2,359명의 초대 [[통일주체국민회의]] 대의원이 선출됐으며, [[12월 23일]] 이 대의원들이 결원 없이 [[장충체육관]]에 모여 투표를 진행했다. 이에 앞서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후보 등록을 받았는데, [[박정희]]가 유일하게 입후보했다.[* 보통 선거에 출마하려면 정당의 공천장이나 유권자 서명을 받아 오면 되지만, 이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00명의 서명을 받는 것이 입후보 조건이었다. 박정희는 22일 [[곽상훈]] 전 [[대한민국 국회의장|국회의장]]을 포함해 무려 515명의 서명을 받아 후보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. 반면, 죽고 싶지 않고서야 다른 후보에게 추천장을 써줄 간 큰 대의원이 200명이나 될 리는 없었으므로 애초에 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 등 야당은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.] 후보는 1명이지만 찬반 투표가 아니라, 백지에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을 채택했다. 따라서 재적 대의원의 과반이 투표에 불참하거나 무효표를 내지 않는 이상 [[박정희]]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. 당시 대의원 중 한 명이었던 송동헌이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선거 전에 정보부에서 대의원들의 글씨체를 조사해 갔으며, 투표장은 비밀 투표가 전혀 지켜지지 않는 완전 감시 분위기였다고 한다. 결국 [[박정희]] 2,357표, 무효 2표[* 둘 다 '''[[오자|"박정희" 한자를 잘못 쓴 경우]]였다고 한다.''' 단 송동헌은 독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'''일부러''' 박정''''의''''로 썼다고 주장했다. 이후 정보 기관의 감시와 주변의 따돌림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고.]로 99.9%의 득표율로 박정희 후보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. 참고로 이 당시 대통령 선거는 재적 대의원의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당선되는 시스템이었다. 즉 유효투표자의 과반이 아니라 무효표 및 결석 인원까지 다 합한 수의 과반을 득표해야 했다. 원래 간접선거는 무효표수와 기권수도 세는 경우가 많긴 하다.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거나, 우리나라의 국회의장 선거가 그렇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